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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eHouse/예술겉핥기

[예술겉핥기③] 영앤리치의 삶을 산 렘브란트의 흥망성쇠

by 초귀폭 2022.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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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생애와 흥망성쇠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렘브란트-기수
렘브란트 『기수』('(The Standard-Bearer·旗手/1636)

 

 

이번에 알아볼 화가는 네덜란드의 월드클래스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입니다. 빛과 어둠의 강렬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화풍으로 '빛의 화가'라고도 불립니다. 젊은 시절 큰 성공을 거둔 렘브란트, 하지만 그 끝은 비참했는데요. 그의 생애를 통해 천재들의 삶도 여느 일반 사람과 다를 바 없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삶을 살았는지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위 그림은 2021년 12월 네덜란드 정부가 1억 7,500만 유로(한화 약 2,331억)에 사들인 렘브란트의 '기수'라는 작품입니다. '기수'는 1636년작으로 기수복을 입은 렘브란트의 자신감에 찬 표정이 표정이 특징입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80년간 독립전쟁(1568~1648년)을 벌이던 시절입니다.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문'을 체결하며 독립을 쟁취하고 이후 황금시대를 누린 시기로써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상당히 역사적 가치가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유대계 유명한 가문인 로스차일드의 프랑스 혈통이 1844년 이후 소유하였던 작품으로 프랑스가 국보로 지정한 작품이었죠. 

 

2019년 로스차일드 가문이 경매에 내놓은 이후로 네덜란드 정부가 계속 추진한 끝에 2021년 12월 고국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렘브란트의 생애

 

1606년 7월 15일 네덜란드 공업 도시 레이던에서 제분업자의 9남으로 태어납니다. 독립전쟁 당시 가장 충성심을 보였던 곳이기도 했죠. 렘브란트는 제분업자였던 아버지 덕에 집안에 비교적 여유가 있었습니다. 레이던 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몇 달만에 그만두고 유일하게 흥미를 느꼈던 미술에 집중하게 됩니다. 

 

미술에 천재성을 보이면서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게 의뢰받은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으면서 스타 화가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당시 해상무역이 발달하면서 다른 유럽 국가와는 다르게 왕이나 귀족이 아닌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이 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성공한 상인들을 위한 초상화의 수요가 폭발하던 시기였고 빛과 그림자를 능숙하게 다루며 인물에 대한 극적인 묘사를 보여주던 렘브란트도 점차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인기가 많아지자 그의 단체 초상화는 다른 화가의 그림보다 10배 이상 가격이 높아지게 됩니다.(1명당 100길더, 한화로 약 1,000만 원)

 

튈프박사의-해부학-강의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

 

미레벨트의 <빌럼 판 데르 메이르의 해부학 강의(1617)>

 

한결같이 정면을 응시하는 단조로운 구도의 미레벨트의 단체 초상화보다 렘브란트의 초상화가 더욱 역동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걸 볼 수 있습니다. 의뢰인 8명은 모두 만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더치페이로 십시일반 모아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들은 아래 그림이 더욱 만족했을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렘브란트의 전성기와 추락

 

이때부터 10년간은 렘브란트가 가장 빛나던 때였습니다. 유명한 미술상의 조카이자 인근 시장의 딸인 '사스키아'와 결혼하면서 신분도 상승하게 됩니다. 무릎에 사스키아를 앉히고 오른손으로 술잔을 높이 들고 웃는 모습이 그의 화려했던 모습을 상기시킵니다. 

 

사스키아와-함께-있는-자화상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매음굴의 탕자(1635)>

 

승승장구하던 렘브란트는 자신의 작품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 유명 그림과 골동품을 사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짐이 늘어나자 1639년 대출까지 땡겨 그 당시 한화로 약 13억 가량의 3층 집을 구매하기도 했습니다.(현재는 렘브란트 박물관으로 사용)

 

이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렘브란트. 1640년 어머니가 사망하고, 태어난 지 몇 주밖에 되지 않은 어린 자식을 셋이나 잃게 됩니다. 결정적으로 1642년 아내인 사스키아가 한 살 된 막내 '티투스'만 남기고 결핵으로 죽게 됩니다. 그의 나이 36세 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럴 때에 또 희대의 역작을 남기게 됩니다. 바로 통칭 '야경'이라고 불리는 작품이었습니다.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로이텐부르크의 민병대(1642)> 통칭 <야경>

 

실제 작품 이름은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과 빌럼 반 로이텐부르크의 민병대>입니다. 437x363cm의 엄청난 크기의 그림입니다. 원래는 낮 배경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그림을 보호하는 '바니시'가 변색되어 어두워졌다는 썰이 있습니다. 100~200백 년 단위로 관리를 해주어야 하는데 그 당시 혹평을 받아 그림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죠.

 

의뢰인은 총 16명으로 중앙 상단 거울 같은 문양에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1인당 100길더씩 1,600 길더(한화 약 1억 6천만 원)를 주고 의뢰한 작품입니다. 하지만 총 34명이나 등장하고 어수선한 분위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녀가 주목되는 점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작품이 되었습니다. 

 

허리춤에 닭을 매달고 있는 정체불명의 소녀는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가상의 인물이며, 죽은 아내 '사스키아'를 닮아 그리움에 그려 넣지 않았나 하는 분석도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개인사와 그림에 대한 혹평이 맞물리면서 그는 추락하게 됩니다. 

 

그림 의뢰는 들어오지 않고 영끌로 산 집도 대출금을 못 갚게 되자 1651년 영국의 바닷길 봉쇄와 맞물려 1656년 '해상 손실'이라는 이름 아래 결국 파산했고, 모아 둔 재산은 경매로 처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림에 손을 놓지 않고 매년 2~3점에 달하는 본인의 초상화를 그려왔습니다.

 

흥망성쇠를 담고 있는 자신의 초상화를 여과 없이 그려온 점이 우리에게 렘브란트가 더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되었죠.

 

렘브란트-자화상-비교
전성기 때와 몰락 후 렘브란트 자화상(KBS 1TV, 예썰의 전당 9화)

 

렘브란트-마지막-자화상
1668년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

 

아내와 둘째 부인, 막내아들까지 다 죽게 되고, 1669년 유대인 구역의 허름한 집에 눈을 감게 됩니다. 30대에 엄청난 성공으로 부와 명예를 누린 렘브란트. 수많은 명작을 남겼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떠나보낸 후의 그의 삶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롭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 앤 리치들의 삶이 몰락하는 스토리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 들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가에 대해 고민하는 순간이 많은데요. 여러분들은 어떠신가요? 돈 많고 잘나가는 사람을 부러워 하기 보단 자신다운 삶은 사는 게 가장 행복하지 않나 생각 해 봅니다. 

 

 

행복한-하루-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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